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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상진 작성일 2016-06-08
조회수 491
조선 청백리 열전 8 - 오억령

?청백리열전 : 오억령
 
오억령(吳億齡) -(1)
 
 
 
 오억령<吳億齡(명종 7년(1552)∼ 광해군 10년(1618)>의 자는 대년(大年), 호는 만취(晩翠), 시호는 문숙공(文肅公), 본관은 동복(同福; 지금의 전남 화순군 동복면)이다. 사옹원 직장(直長)을 지낸 오세현(吳世賢)의 아들로 동복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랐다.
 
 오억령은 5세 때 독서할 줄 알았으며 7세에 글을 지어서 사람들은 그를 신동이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더욱 학문이 깊어졌으며 글씨에도 능하였다. 선조 3년(1570) 19세 때 소과(小科)에 급제하여 선조 14년에 천거를 받아서 전생서(典牲暑)의 참봉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 이듬해인 선조 15년(1582)에 문과에 급제, 바로 예문관 검열로 승진했다. 이 무렵 선조는 장차 임금에게 통감강목(痛鑑綱目; 주자가 지은 중국의 역사)을 강독하게 하기 위해서 재주 있는 문신 5명을 선발하였는데 오억령도 여기에 참여했다. 선조는 이들에게 각각 통감강목 한 질씩을 하사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도록 하였고, 사람들은 이를 다시없는 영광으로 여겼다.
 
 오억령은 그 뒤 호·이조좌랑을 거쳐선조의 특명으로 휴가를 얻어 독서당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홍문관 교리, 응교, 사간, 전한, 이조참의, 대사간, 도승지, 강화부사,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대사헌 5회, 형조판서를 3회 역임하고 우참찬, 개성유수(開城留守)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있을 것을 예견
 
 
 선조 24년(1591), 오억령이 사간원 전한(典翰)으로 있을 때,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豊臣秀吉)]의 사신 겐소[현소(玄蘇)]가 내한했다. 오억령은 겐소를 접대하는 선위사(宣慰使)가 되었다.
 
 오억령은 겐소를 만나보기에 앞서 도중에서 그가 “내년에 일본군이 명나라를 치기위해 조선을 침범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곧 선조에게 달려가 일본이 반드시 크게 쳐들어 올 것이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일본에 갔던 통신사의 한 사람인 김성일(金誠一) 등 한쪽 말만 듣고 일본군은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행여 변경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쓸데없이 풍파를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지탄을 받던 때였다. 그래서 조신들은 오억령의 말을 듣자 크게 놀라서 선조에게 주청하여 그의 직책을 바꾸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오억령은 다시 그의 생각을 선조에게 상소할 준비를 했다. 이를 본 그의 자제들이 또 어떠한 처벌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만류하자 오억령은 크게 한탄하면서 “일본군이 틀림없이 쳐들어오려고 하는데 모든 신하들이 임금에게 숨기고 있으니 내 어찌 화를 두려워하여 말하지 않고 국사를 그르치겠느냐”라고 말하면서 기어이 겐소와 만나 나눈 ‘문답일기’와 그의 언동을 기록하여 상소함으로써 더욱 당로자의 미움을 샀다.
 
 그는 이러한 일 때문에 의정부 검상(檢詳)으로 옮겼다가 그 뒤 두 번이나 파직이 된 다음에 사성이 되었으나 그해 10월에 명나라로 가는 진진사(陳秦使)의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명나라로 떠났다. 그를 배척하기 위한 사람들의 책동 때문이었다.
 
 선조 25년(1592) 4월, 오억령이 예견한대로 일본군 21만 명의 대군이 조선에 쳐들어 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오억령은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이 소식을 듣고 의주로 피란가는 선조를 개성에서 맞아 복명한 다음 왕을 호종했다.
 
 의주에 도착한 다음, 오억령은 직제학과 이조참의를 거쳐 우부승지에 제수되어 선조를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다. 이 때 선조는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 오억령에게 “앞서 일본군이 침범할 것이라고 말한 신하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오직 홀로 경만이 이를 예견했다”고 말하면서 그의 선견지명을 치하했다.

청백리(淸白吏)로 뽑히는 것을 사양
 
 
 선조의 신임을 얻은 오억령은 임진왜란 중 그의 능력을 발휘하여 많은 공적을 쌓았다. 당시 명나라 구원병의 총지휘관은 명나라 병부시랑이었던 송응창(宋應昌)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명나라에 구원을 청하자 경략[經略, 경략방해비왜군무(經略防海備倭軍務)]이 되어 출동했으나 요동에서 진군을 멈추고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평양과 개성을 탈환한 뒤에야 들어와서는 오히려 이여송을 무고(誣告)한 위인이었다. 성격이 몹시 편협하고 간악했다.
 
 이 때 송응창과의 섭외를 담당하는 접반사로 있던 윤근수(尹根壽)의 천거로 오억령은 그의 부사가 되었다. 모든 일에 일일이 까다롭게 굴던 송응창도 오억령이 부사가 된 다음에는 그가 작성한 문서들을 보고는 기뻐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억령은 그 뒤 대사간, 병조참의를 거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선조 29년(1596), 서자 출신의 이몽학(李夢鶴)이 충청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선조는 그 일당들에 대한 정국(庭鞠; 의금부 또는 사헌부에서 왕명에 의하여 죄인을 국문하는 일)에 도승지인 오억령이 참여하도록 하명했다. 그러나 그는 도승지가 거기에 참여하여 뒤에 포상을 받는 것이 개운치가 않아 이를 굳게 사양했다.
 
 선조 29년에 물러간 일본군은 선조 30년(1597)에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정유재란(丁酉再亂)]. 오억령은 이 해에 가선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그리고 예·이조참판 등을 거쳐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강화부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당시는 전란 중이어서 백성들은 곤궁에 허덕이고 재정도 어려웠으나 그는 청렴결백하고도 공명정대하게 법을 집행함으로써 치적을 크게 올렸다. 이 무렵에 선조의 왕비인 의인왕후가 해주에 행차한 일이 있었다. 이 때 왕후를 호종한 환관들이 왕후를 빙자(憑藉)하여 백성들로부터 법을 어기며 재물을 징구하는 행패(行悖)가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오억령은 그 무리들을 징치함으로써 관내가 숙연해졌다.
 
 선조 34년(1601)에 왕은 전란 등으로 흐트러진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본보기로 하기 위해 염근리[廉謹吏, 조선조에서는 마음이 청렴하고 곧은 사람 중 고인이 된 관원은 청백리(淸白吏), 그리고 살아있는 관원은 염근리로 녹선했다.] 4명을 선발했다. 오억령은 그 가운데 첫 번째로 뽑혔으나 그는 자신은 적격자가 아니라고 하여 끝내 이를 사양했다.
 
 조선조에서는 청백리로 녹선되면 본인은 품계가 한 계급 올라가고 그의 자손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서도 벼슬을 주는 소위 음사의 특전을 주어졌을 뿐 아니라, 사대부가에서는 이를 다시없는 영광으로 여겼다. 그런대도 오억령은 스스로 이를 굳게 사양했던 것이다.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간신(奸臣)의 책동으로 파직
 
 
 1608년, 선조가 재위 41년만에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했다. 오억령은 명나라에 왕의 서거를 알리고 새 왕의 즉위에 대한 승인을 받아오는 고부사(告訃使)의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갔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는 조선에 대해 토라진 일이 있어 신 왕의 즉위를 승인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그 책임을 사신들에게 물어 오억령 등을 파직했다.
 
 그 뒤 곧 다시 병조참판으로 제수되었다가 한성판윤을 거쳐 대사헌을 5회, 형조판
서를 3회씩 역임했다. 그는 특히 형조판서를 역임하는 동안에는 법을 엄정하게 집행함으로써 부정한 오리(汚吏)들의 농간을 막고 소송을 지체 없이 공정하게 처리함으로써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오억령은 이어 의정부 우참찬을 지낸 다음 개성유수에 임명되었다. 그는 부임과 동시에 오랜 폐정을 철저히 개혁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등 그 치적이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북파(大北派)의 정인홍(鄭仁弘)이 무신년에 있었던 고부사의 일을 다시 끄집어내어 시비하므로 개성유수를 사임했다. 오억령이 파직됐다는 소문이 퍼지자 개성시민들은 통곡을 하면서 그의 돌아가는 길을 막고자 하였으나 이미 떠나간 뒤였다. 그래서 그들은 노래를 지어서 애석하게 여김과 동시에 송덕비를 세워 그를 추앙했다. 개성을 떠난 오억령은 도중에 귀양을 보낸다는 소문이 있어 서을에 돌아오지 않고 근교에서 귀추를 기다리다가 4년만인 광해군 10년(1618)에 작고하니 그의 나이 67세 때의 일이다.
 
 


10년 동안 헌옷을 바꾸지 않아
 
 
 오억령은 외모가 단아하고 성품이 조용했다. 그는 학문이 깊었을 뿐 아니라, 문장이 아름답고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그러나 그는 평생 동안 언제나 겸손하며 오만한 언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또 굳은 뜻을 지니고 이를 행동에 옮기는 것을 신조로 삼았으며 극단적인 언동을 삼갔다.
 
 광해군 5년(1613), 대북파들이 영창대군을 강화에 귀양 보내고 인목대비를 폐출하려고 하는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오억령은 홍문관에서 벼슬하고 있는 두 아들에게 “국모를 폐출하는 것은 인륜의 큰 변이니 뒤에 어찌 죽음을 면하랴”라고 훈계했는데 그들은 이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뒷날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오억령은 평생 재물에 욕심이 없었다. 부보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시집이 가난한 누이에게 모두 고스란히 물려주고 자신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옷을 한 번 마련하면 10여년 동안 헤어져서 누더기가 될 때 까지 입고 다녔다. 그의 부인도 역시 청백리였던 홍담(洪曇)의 딸이었는데, 그의 이처럼 청렴한 생활은 홍씨의 내조의 공이 컸다.
 
 오억령에게는 아우 오백령(吳百齡)이 있다. 그도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는데 이들 두 형제의 가문에서는 뒤에 8명의 판서를 배출했다. 이밖에도 동복(同福) 오씨의 인물은 거의가 이들 형제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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