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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상진 작성일 2016-10-13
조회수 741
조선 청백리 열전 18 - 이황

?청백리열전 : 이황
 
이 황(李 滉)
 
 이 황<李滉(연산군 7년(1501)∼선조 3년(1570)>의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도수(陶?), 퇴도(退陶), 시호는 문순공(文純公), 본관은 진보(眞寶, 지금의 경북 청송군 진보면)이다.
 
 그는 청백리보다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함께 조선조 유학계를 대표하는 성리학의 대가로 더욱 유명하다. 그래서 영남(嶺南) 사람들은 퇴계를 ‘동방의 주부자(東方의 朱夫子)’라고 칭송한 반면에 기호(畿湖) 사람들은 율곡을 ‘동방의 대현(東方의 大賢)’이라고 기리고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그 품격이 고결하며 학문이 정밀하고 깊이가 있으며, 동방의 유학을 집대성하였다. 특히 퇴계의 학문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일본, 중국 등 동양 3국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가 살아온 생애의 대강을 간추려서 소개한다.
 


뛰어난 총명과 자질
 
 
 이황의 5대조 자수(子修)는 고려 때 홍건적을 토벌한 공로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져 처음으로 안동군에 들어왔다. 그 뒤 할아버지 계양(繼陽)이 집을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안동군 도산면 도산리)로 옮겨 이황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계양은 진사였으며, 아버지 식(埴)과 숙부 우(?, 경상도관찰사 역임), 형님 해(瀣, 대사헌 역임) 등 모두가 학문에 힘쓰던 사람이었다. 이황은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박씨와 숙부에게 훈육을 받았다. 그는 천품이 아름답고 총명이 뛰어났다.
 
 12세에 숙부에게 논어(論語)를 배울 때, “무릇 일의 옳은 것이 곧 이치입니까[범사지시자 시리호(凡事之是者 是理乎)]하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숙부는 ”네가 벌써 글 뜻을 아는구나.”하며 기뻐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또 18세 때, 그가 탄생한 온계리 부근 연곡에 놀러갔는데 조그만 연못에 물이 매우 맑았다. 이황은 그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이슬에 젖은 고운 풀 푸른 언덕 둘렀는데
작은 못 맑은 물에 모래도 없구나
구름이 날고 새 지나가는데
그림자는 비추어지기 마련이나
다만 때때로 제비가 물결 찰까 두렵구나
 
 이 시는 도학(道學)의 오묘한 경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하는데, 이황이 뒷날에 도학을 대성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겠다.
 
 
 
[참고] 도학(道學) : 유학(儒學)의 한 분파로서 중국의 송대에 발달한 정주학(程朱學) 또는 주자학(朱子學)의 별칭.
유학은 그 시대와 학파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발달하였다. 이를 테면,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그리고 순자(荀子)를 중심으로 한 원초유학(原初儒學)은 한대(漢代)의 훈고학(訓?學), 당대(唐代)의 문장 위주의 사장지학(詞章之學), 송대의 철학사상을 기본으로 한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 명대의 심학(心學)으로 발달한 양명학(陽明學), 그리고 청대에 와서 고증학(考證學)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 등 시대에 따라 특징을 달리해 발전하였다.
그 가운데 도학은 송대에 와서 크게 일어난 정주성리학의 별칭이니, 북송의 주돈이(周敦?)·장재(張載)·소옹(邵雍)·정호(程顥)·정이(程?) 등 이른바 오군자(五君子)에 의해 창도, 전개되고, 남송의 주희(朱熹)에 의하여 집대성된 송학(宋學)을 말한다.
 
 
 이황은 28세 때인 중종 23년(152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5년 뒤에 성균관에 입학, 중종 29년 34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처음 정자(正字)로 벼슬길에 올라 호조좌랑 등을 거쳐 39세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어 호당[湖堂, 독서당(讀書堂)의 별칭]에 선임되었다. 그 뒤 전적, 단양· 풍기군수, 교리, 대사성, 부제학, 공조참판, 예조판서, 판중추부사 겸 대제학을 역임했다.

왜구(倭寇)에 대한 대책을 건의
 
 
 이황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등이 연달아 일어났던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티 없이 순수하고 고결했던 그도 이러한 사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인종 1년(1545), 45세 때 홍문관 전한에 임명되었다. 이 해 7월에 인종이 승하하고 10월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서 윤임(尹任), 윤관(尹瓘) 등이 처형되고 많은 선비가 화를 입었다. 이 때 이황도 이기(李?)의 음해로 파직, 관직도 삭탈 당하였다. 이기의 조카인 이원록이 고자질하기를 이황이 그들의 시론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역설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황은 2년 뒤인 명종 2년에 응교로 다시 소환되었으나 그 해에 양재벽서사건(良才壁書事件; 을사사화의 연장으로 윤원형 등이 윤임 일파의 잔여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꾸민 옥사)이 일어나자 다음 해에 어지러운 서울을 피하여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나가게 되었다.
 
 이에 앞서 윤원형(尹元衡)의 심복인 진복창은 평소에 이황의 학덕을 사모하여 그가 자기 집에 한 번 찾아오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이황이 이를 거부하자 그는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황이 부득이 그의 집 앞을 지나치다가 우연히 진복창(陳復昌)의 사람을 만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그를 찾게 되었으며, 진복창은 이러한 사실을 다시없는 영광이며 자랑거리로 삼고 있었다.
 
 그 뒤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하게 된 것을 알게 된 진복창은 생색을 내기 위해 이황과 같은 학덕 높은 선비가 외직에 나가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니 만류할 것을 명종에게 상소했다. 그러나 명종은 “단양은 그동안 백성들이 피폐가 심하여 이를 바로 잡을 관원을 얻지 못하였던 터이며, 또 이황이 이미 부임하였으니 재론하지 말라.”하고 듣지 않았다. 이황은 이러한 일들이 모두 소인(小人) 때문에 겪은 봉욕(逢辱)이며 부끄러운 일들이라고 뒤에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황은 학자이지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간절하였을 뿐 아니라, 정세를 판단하는 통찰력도 남달리 뛰어났던 것 같다.그는 홍문관 전한으로 있을 때, 유명한 ‘걸물절왜사소(乞勿絶倭使疏)’를 올렸다. 중종 5년(1510)에 삼포(三浦)에서 왜인들이 난을 일으켜서 이를 토벌한 다음, 끊었던 대마도와의 외교를 다시 회복할 것을 주장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황은 다시 마지막으로 궐하(闕下, 대궐 아래라는 뜻으로, 임금의 앞을 이르는 말)를 떠날 때인 선조 2년(1569) 3월에 선조에게 올린 긴 상소에서 “ …… 지금은 가히 정치가 잘 되고 있으나 남쪽과 북쪽으로부터 외국이 침범할 틈이 있고 백성은 곤궁한데 나라의 창고가 비어 있으니 장차 나라 노릇을 못하는 지경에 이를지 모르며, 갑자기 사변[事變, 사람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는 천재(天災)나 그 밖의 큰 사건]이 있으면 토붕와해(土崩瓦解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진다는 뜻으로, 어떤 조직이나 사물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버림을 이르는 말)의 형세가 없지 않으니 우려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하고 일본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이 건의는 실로 이율곡의 ‘10만 양병론(10萬養兵論)’에 앞서 10년 전의 일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년 전의 일이었다.

산수(山水) 즐기며 학문에 정진
 
 
 이황은 어머님이 연로하고 형님의 권유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입신양명(立身揚名)에는 별 뜻이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고 있던 36세 때 지은 ‘감춘(感春)’이라는 시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삼년 동안 서울의 봄은
멍에 맨 망아지처럼 움츠러들었으니
실없어라 마침내 무슨 도움 있었던가
밤낮으로 나라 은혜 부끄럽도다 …….
 
 더욱이 이황은 을사사화 때 간신들의 음해를 받았으며, 또한 대사헌을 지낸 형님 이해가 명종 5년에 이기, 이무강 등의 모략으로 갑산(甲山)으로 귀양살이 가는 도중에 원통한 죽음을 당한 뒤에는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물러날 결심을 굳혔다.
 
 그는 그 뒤에도 여러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번번이 이를 사양하거나 취임하여도 신병을 빙자하여 곧 고향으로 돌아왔다. 을사사화 이후에는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독서와 구도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호 퇴계(退溪)는 이 토계(兎溪)를 바꾼 것이다.
 
 이황은 일찍이 서울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읽고 기뻐하더니 이 때부터 문을 닫고 이 책에 정신을 기울여 밤낮으로 사색하며 참된 지식을 얻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그가 주자학(朱子學)을 사숙하여 그 학문을 연구하고 이해하기는 이 때부터이며 명종 10년(1555)에는 고향에 돌아와서 오로지 독서와 연구로 은둔하였다.
 
 이 무렵 명종은 이황을 소환하였으나 그는 신병으로 상경하지 못했다. 이를 애달피 여긴 명종은 비밀리에 화공을 시켜 이황이 살고 있는 도산의 산수(山水)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게 한 다음 병풍을 만들어 완성하였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보통사람으로 지낸 한 평생
 
 
 이황은 명리를 초월하고 부귀영화를 뜬구름처럼 여긴 학자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평소에 자긍심을 내세우지 않은 채 보통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행동하면서 평생을 검소하고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언제나 포의(布衣)를 입고 방석은 버들자리로 자족하였으며, 출입을 할 때에는 칡으로 삼은 신에 죽장을 짚고 다녔다. 이황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철저히 경계했다. 그가 서울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웃집 밤나무 가지가 울타리를 넘어 그의 집 마당 위에까지 뻗어 있었는데 밤송이가 벌어져 집안 뜰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황은 집의 어린 아이들이 그 밤을 주워서 먹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떨어지는 대로 주워 밤나무 주인집으로 던졌다는 이야기가 기록에 남아 있다.
 
 이황은 선조 1년(1568)에 판중추부사 겸 직제학으로 있으면서 고향에 내려와 물러날 것을 임금께 청하였다. 그러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신병을 얻었다. 그는 아들 준(寯)에게 “(내가 죽은 다음에) 묘에 비석을 세우지 말고 작은 돌로 앞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표시하라.”고 유언하였다. 그리고 선조 3년에 조용히 숨을 거두니 그의 나이 70세 때의 일이다.
 
 부음을 듣자 조정에서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정일품의 예로써 장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준은 아버지의 유언으로 정부의 예장을 사양하였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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