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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상진 작성일 2016-10-13
조회수 414
조선 청백리 열전 17 - 송흠

?청백리열전 : 송흠 
 
 
송 흠(宋 欽)
 
 
 송 흠<宋 欽(세조 5년(1459)∼명종 2년(1547)>의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 시호는 효헌(孝憲),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신평 송씨의 시조는 여산(礪山) 송씨의 후손인데, 송흠은 삼계현(森溪縣; 전남 장성군에 있었던 지명)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았다.
 
 
소과(小科)급제로 입신양명(立身揚名)
 
 
 송흠은 문조전[文照殿; 조선 태조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사당]의 참봉[參奉;조선 시대에, 여러 관아에 둔 종구품 벼슬. 능(陵), 원(園), 종친부, 돈령부, 봉상시, 사옹원, 내의원, 군기시 따위에 두었음]을 지낸 가원(可元)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종 11년(1480) 22세 때 소과에 급제, 성종 23년에 벼슬에 올라 승문원에 출사했다. 2년 뒤에 연산군(燕山君; 1494∼1506)이 즉위하고 점차로 학정을 일삼게 되자 고향으로 내려와서 지냈다.
 
 중종이 즉위한 다음에 홍문관 정자(正字)로 소환되어 수찬, 사간원 정언(正言), 병조좌랑, 전라도 도사, 사헌부 지평, 보성·옥천군수, 순천부사, 여산군수, 진주부윤, 광주·나주목사, 승지, 담양부사, 한성부 좌윤,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역임하였다. 이처럼 송흠은 낮은 문벌에서 태어나 진사와 생원을 뽑는 소과(小科)에만 급제한 신분으로 종일품인 숭정대부(崇政大夫)까지 지냈다. 이는 그가 목민관(牧民官)으로서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청렴결백한 생활과 뛰어난 효행으로 모든 관원의 모범이 됨으로써 임금과 조정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삼마태수(三馬太守)’ 별명의 유래
 
 
 송흠은 성품이 온순하고 행동이 신중하며 벼슬이나 재물에는 욕심이 없었다. 지방 수령으로 부임하면 오직 청렴 검소하게 살면서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펴는데 충실했던 그는 어머님을 제외한 가솔들이 기한(飢寒)을 겨우 면할 수 있는 곤궁한 생활을 하였으며, 임지(任地)가 바뀌어 떠나는 날에는 한 섬의 쌀도 저축이 없었다.
 
 재물이 없기 때문에 새 수령으로 부임하는 행차는 언제나 단출하여 경우 말 세 마리만을 이용했다. 송흠이 타는 말이 한 필, 그의 어머님이 타는 말, 그리고 그의 부인이 타는 말 등 모두 세 마리가 전부였다.
 
 그는 50여 년 동안 벼슬살이를 하며 보성과 옥천군수를 시작으로 전후 8개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으나, 이와 같은 그의 부임행차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항상 세 필의 말만 이용하는 수령이라고 하여 송흠에게 삼마태수(三馬太守)라는 별명을 붙였던 것이다.
 
 송흠은 중종 10년(1515)에 중종으로부터 청백리로 포상을 받았고, 다시 중종 33년 등 전후 7차에 걸쳐서 포상을 받았다. 평생 동안 단 한번 청백리로 녹선이 되어도 다시없는 영광으로 여겼던 조선조의 관료사회에서 일곱 차례나 포상을 받은 사례는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사실이다. 소과(小科)출신으로 종일품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오직 그의 이러한 청렴한 관직생활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백성을 위해 호산춘(壺山春)을 개발
 
 
 송흠이 전라북도 여산군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 서울로 올라가는 관원이나 지방으로 새로 부임해 가는 관원은 물론, 일반인의 왕래가 많은 교통의 요충지였던 여산의 지리적 조건 때문에 공사 간에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서 대접하기에 힘 겨울뿐 아니라, 또 대접할 만한 마땅한 특산물도 없었다. 이와 같이 공용에 드는 경비는 마땅히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면 되는 것이었으나 백성을 아끼던 송흠으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고심 끝에 송흠은 그 지방의 좋은 물을 이용, 특별한 방법으로 호산춘(壺山春)이라는 술을 빚어 공무로 찾아오는 손님에게 대접했다. 이 호산춘이라는 술은 손님들에게 대단한 호평을 받는 동시에 경비도 크게 줄이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 스스로는 조그마한 물욕도 없으면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밤낮으로 고심하는 정신, 이것이 바로 송흠의 참된 마음가짐이었던 것이다.
 
 
뛰어난 효심(孝心)에 왕(王)도 감탄
 
 
 송흠은 평생을 청렴과 효성을 두 기둥으로 하여 산 사람이었다. 그는 사헌부 지평으로 있다가 연로한 어머님 정(鄭)씨 부인을 봉양하기 위해 중종에게 외직으로 나가기를 간청하여 보성군수를 시작으로 전후 8개 고을의 수령을 두루 거치면서 어머님을 봉양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중종 29년(1534), 송흠은 전라도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그 때는 이미 어머님이 99세의 고령이므로 임지에 모시고 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송흠은 중종에게 상소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머님을 봉양할 수 있게 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의 나이 77세 때의 일이다.
 
 중종의 윤허를 받은 송흠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머님을 정성껏 봉양하면서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날씨가 춥거나 더워도 결코 관대를 벗는 일이 없었다.
 
 송흠은 어머님이 101세의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신 뒤에는 자신의 고령을 돌보지 않고 젊은이처럼 제례 일절을 스스로 치름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자녀 혼인은 가난한 사람과
 
 
 송흠은 참혹한 사화들이 연이은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그는 청렴결백한 성품에다가 더욱 처신을 삼갔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에는 그의 호를 스스로 ‘지지당(知止堂)이라고 지었다. 자신의 분수를 지켜서 멈추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송흠은 언제나 “혼인을 함에 있어서 재물과 벼슬을 고르는 일은 오랑캐가 할 짓이며, 사대부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경계했다. 그리하여 그의 자제들은 모두 가난하면서도 행실(行實)이 있는 집안의 자제들과 통혼을 했다.
 
 송흠은 어머님의 복상이 끝난 다음 중종 33년(1538)에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 정이품)로 특진되어 이·병조판서에 연달아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상소하여 고령으로 물러날 것을 간청했다. 
 
 중종은 마지못해 이를 윤허했다가 중종 36년, 청렴하고도 충성스러운 송흠을 잊지 못하고 다시 그를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했다. 송흠은 궐내에 들어가서 사은한 다음 다시 고향에 머물 수 있게 해 줄 것을 간청했다.
 
 송흠이 고향으로 내려가는 날, 조정의 많은 재상과 명사들이 한강(漢江)까지 나와서 청백리가 떠나는 길을 전송했다. 당시 당상관(堂上官)이상의 관원은 임금의 윤허가 없으면 도성을 함부로 나올 수가 없었으나 이 날은 정승들이 특별히 왕에게 아뢰어 윤허를 받았던 것이다.
 
 중종은 평생을 청백리로 가난하게 지내온 송흠에게 국록을 내리기 위해 고향에 있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품계를 올려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사(知經筵事;조선 시대에 둔, 경연청의 정이품 벼슬)에 제수하는 특전을 내렸다.
고향에 내려와 자연을 벗 삼고 자적하던 송흠은 명종 2년(1547)에 노환으로 작고하니 그의 나이 89세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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